명불허전(名不虛傳)의 반백년(半白年)-베자르 발레단 (Bejart Ballet Lausanne)의 공연

춤추는거미 | 2005.03.09 15:35 | 조회 6426

명불허전(名不虛傳)의 반백년(半白年)
-베자르 발레단 (Bejart Ballet Lausanne)의 공연

2005년 2월12-13일 대전 문화예술의 전당에서 열린 베자르 발레단의 공연은 4개의 작품으로 이루어졌다. 공연순서에 따라 언급하면 불새(The Firebird 21분, 1970년작), 브렐과 바르바라(Brel and Barbara, 55분, 2001년작), 비엔 비엔(Wien Wien nur Du allein, 25분, 1982년작), 볼레로(Bolero, 17분, 1961년작)인데 이 중 가장 유명한 작품은 가장 짧으면서도 가장 오래 된 볼레로일 것이다. 결론을 요약하라면 '명불허전(名不虛傳)'이란 한마디로 매조지할 수 있는 이번 공연에 있어 그 정수를 보여준 것은 모리스 베자르의 안무보다는 하나 같이 오케스트라의 악기의 역할을 충실히 해내던 무용수들이 아니었나 싶다.
모리스 베자르란 상징기호는 이미 무용애호가들에게는 물론이거니와 공연예술에 어느 정도 안목이 있는 일반인들에게도 이미 지나간 기호이다. 그러니까 베자르와 또 그와는 떨어질 수 없는 (한심한 비교지만, 프로야구에 있어 김응룡과 선동렬 같은,) 저 유명한 조르쥬 동이 활약하던 1970-80년대야말로, 그러니까 80년대 중반 한국의 안방극장을 통해 문화, 예술계는 물론 연예계, 광고계의 인사들에게 라벨의 볼레로라는 음악을, 특히 그 서두 32마디를 성전으로 받들게 만들었던 영화 <사랑과 슬픔의 볼레로>에서 보여주던, 그 조르쥬 동의 말라 비틀어진 허리와 관능적인 포르 드 브라가 생생하게 살아 숨 쉬던 때야 말로 베자르의 전성기였다는 것이다.
그 후에는 21세기 발레단이 망하고 스위스 로잔에서 조그만 구멍가게 하나 차려 놓고 옛 명성 팔아먹으며 알프스 공기 맑은 산골에서 떠나간 연인 조르쥬 동과의 화려했던 옛날을 회고하며 골골히 살아 계시는 정도로만 막연히 알고 있었다.(아직도 그를 성전처럼 받들어 모시는 일본과 또 그 일본 시장보다 몇 년 늦게 나발부는 한국이란 곳에서 뭐 1년치 생활비정도야 책임져 줄테니) 그러니까 나는 이번에 그 조그만 구멍가게를 본 것 인데, 2시간 정도의 시간이 지난 후 나는 내가 가진 천박하고 옅은 선입견을 수정 할 수밖에 없었다.
먼저 공연 기획 측에서는 베자르의 공연세계를 개괄할 수 있는 작품으로 선정하였다고 하였다. 기획자 측 말마따나 한 번의 공연을 통해서 한 작가의 모든 예술세계를 보여준다는 것이 무리이겠지만 그래도 차라리 하나의 대작을 보는 것 보다는 이처럼 60년대와 2000년대에 걸친 작품을 개관하는 것이 더 나을 수 있다 싶었다.
첫 번째 작품 <불새>는 스트라빈스키의 음악으로 더욱 유명한 작품이고, 엄밀히 말하면 베자르 역시 남의 작품을 패러디한 후 자신의 작품을 원전으로 만들어 놓은 케이스다. 무용사에 빛나는 1910년에 초연된 스트라빈스키와 포킨의 작품이 그러니까 남의 작품이면서 원전이다. 이 둘이 러시아 민화에다 놋쇠그릇에 철수세미 긁어대는 소리를 가지고 탄생시킨게 바로 <불새>이다. 이 원전 불새는 이후 발란신이나 리에파 등 수 많은 안무가들이 자신의 버전으로 만들어 냈는데 그 중 베자르의 불새가 가장 보편적인 <불새>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 점 작곡가인 스트라빈스키야 그렇다 치더라도 발란신이나 리에파 등 자신이 생각할 때 베자르 정도야 무릎 치도 못 올 철부지라고 우습게 생각하실 안무가님들도 현재 각자의 불새로 버는 로열티를 따지면 베자르에 못 미칠 테니 별 반론이 없으실게다.(뭐 나도 그 분들이 자신의 작품으로 1년에 얼마씩 벌고 계시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불새>에서의 주역은 가슴이 깊이 파인 V형의 빨간색 네오타드에 가슴에 가로띠를 두른 의상을 입은 남녀인데 이 중 비중은 단연 남자이다. 다 타버린 재에서 승화하는 영혼의 메타포를 상징하는 이 남성불새는 작품 초반 꽤 긴 솔로를 추는데 이 날(내가 본 날은 둘째 날이다)의 불새인 동양계 무용수는 약간 역부족으로 보였다. 중간 중간 발란스를 잃어 주춤거리기도 하고 호흡이 툭툭 끊어지던 주역 무용수로 인해 사실 불새란 작품에서는, 스트라빈스키의 기묘한 음악과 발란신이 만들어 낸 턴아웃을 무시하면서도 기묘한 군무진을 형성해 가는 베자르의 전형(이제는 이미 하나의 고전이 된)을 음미하는 것으로 만족하였다.
이어서 <브렐과 바브라라>가 공연되었다. 앞 작품인 <불새>가 1970년작이고 이 작품이 2001년이니 그 사이에는 30년의 간극이 존재하는데 역시나 불새와는 다른 스크린이 펼쳐지고 있었다. 내가 스크린이라 말하는 이유는 공연에 중간 중간 영상을 썼다는 말이 아니라 불새가 하나의 긴 장편시라면 이 작품은 영화의 구성을 따르고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러닝타임 55분으로 이 날 공연된 작품 중 가장 긴 작품인 <브렐과 바르바라>는 유명한 샹송가수의 이름이라는데 나는 사실 들어 본 적도 없거니와 앞으로도 굳이 찾아서 듣고 싶은 생각도 없다. 다만 자전거가 나오고 검은벨벳의 원피스를 입은 여인과 캐쥬얼한 양복에 드레스 셔츠 소매를 걷은 남자 무용수가 난이도 어려운 파 드 되를 하고 군무진은 어울리지 않는 면바지에 면티를 입었으면서도 노란색 망토와도 같은 천이 스카프가 되기도 하고 스커트가 되기도 하면서 관객을 영화라는 액자 속으로 끌어들이고 있었다. 스카프와 스커트는 한 순간 무용수의 전신을 뒤집어씌워 신체를 커다란 토르소처럼 만들기도 하였는데 작품의 배경을 알 수 없는 나는 그 세세한 의미는 알 수 없었지만 무용수들이 만들어 내는 영상만으로 충분하였기에 굳이 그 의미에 대한 궁굼증도 일지 않았다. 그렇다 역시 넌버벌은 넌버벌대로 의미를 던지는 것이다. <브렐과 바르바라>가 가진 많은 이야기도 지구 반대편의 관객들에게는 그러니까 브렐과 바르바라라는 유명한 샹송을 알 바 없는 극동의 관객들에게도 하나의 의미로 담아지는데 아무런 무리가 없었다. 왜, 좋은 무용수들에 좋은 구성이니까... 주옥과 같은 샹송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이 한국의 불초소생은 언뜻언뜻 딴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것은 ‘언젠가 송대관도 태진아도 무대예술과 조합될 수는 없을까’라는 경망한 생각이었다, 트로트와 샹송을 등가로 평가하느냐 아니냐는 차치하고 일단 그 가능성에 마저, 조심스런 시도에 마저 냉소를 던지는 분위기가 문제가 아닐까. 사실 아주 쉬운 일이다. 결국엔 좋은 무용수에 좋은 구성만 갖춘다면... 하긴 말이 쉽지...
세 번째 작품은 <비엔 비엔>이다. 비엔이란 오스트리아의 수도 비엔나의 현지 발음이다. 더욱 엄밀히 말하면 그 도시에서 꽃 핀 모차르트 같은 고전음악의 대가들에 대한 헌정과 같은 작품이며 세박자의 위대한 춤 왈츠에 대한 백과사전적 해석이다. 앞의 작품이 옴니버스식의 단편이 겹쳐지는 구성이었다면 이 작품은 줄거리가 없는 추상적 이미지가 중첩된다. 음악은 비엔나 학파라고 해 놓고 쇤베르그, 알반베르그, 요한 스트라우스의 이름을 명기하였다. 그러니까 이들을 비엔나 학파라 명명하는 모양이다. 이럴때는 그저 내 무식이 죄다. 하지만 나 개인적으로는 이 작품이 가장 맘에 들었다. 무용수들 하나 하나가 자신들의 작품을 만개시키고 있었고 왈츠의 움직임에 맞춘 흥겹고도 축제적인 움직임에 지구의 종말을 담은 메시지도 맘에 들었다. 이 작품에서 무용수들은 그들이 가진 모든 테크닉(90%이상의 발레)을 사용하면서 발레 같지도 않은 발레를 만들어 냈는데 모르긴 몰라도 비엔나 지하에 묻힌 음악가들께선 한 잔 하면서 근처 노래방이라도 몰려가셨을 듯하다.(쇤베르그, 스트라우스, 모차르트가 함께 있는 노래방이라, 와우! 생각 만해도 대단하다. 근데 비엔나에도 있을까 노래방이...)
마지막 작품은 저 유명한 <볼레로>였다. 1961년 작이니 한 반세기 묵은 이 작품을 보고 난 후 몇 몇으로부터 실망했단 말을 많이 들었다. 기실 그렇게 보인 것은 사실이다. 일단 조르쥬 동이 올라가 추던 둥근 원탁위의 솔로를 이 날은 여자가 맡았는데(전 날은 남자였다고 함) 아무래도 다소 약해 보인 것은 사실이었다. 그리고 둥근 원탁을 기준으로 좌우 그리고 무대 업스테이지에 한 줄, 이렇게 해서 3면을 의자로 둘러 쌓은 후 무용수들이 점차 캐논으로 움직이며 움직임을 증폭시켜나가는 볼레로에서 한 면 그러니까 무대 뒤쪽의 한 줄은 대전현지에서 엑스트라로 충원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제법 허우대 있는 남자 한 20여 명 쯤 불러 놓고 웃짱까고 폼 잡으면서 있으라는 것인데 아무래도 객석에선는 허점으로 보였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현재 베자르 로잔 발레단의 단원은 한 40여 명 정도이고 <볼레로>는 총 60여 명이 필요하니까 그렇게 충원하는 것도 나쁘진 않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어쩔 수 없이 작품의 볼륨감이 떨어지긴 했지만 <볼레로>의 원형이 훼손되지는 않았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나는 앞으로도 이 17분짜리 짧은 발레작품이, 반 세기 울거먹으면서 안무자에게 부와 명성을 안겨준 이 작품이 앞으로도 한 50년은 끄떡없이 살아가겠다라는 생각을 했다. 이미 또 하나의 고전인 이 작품이, 무대 중앙에 놓인 커다랗고 둥그런 원탁이 내게는 자궁으로 보였으며 이 자궁을 통해 얼마나 많은 안무가와 작품들이 새로운 창작과 실험의 길에 대한 비전을 보았을까, 아니 어쩌면 지금도 진행되고 있는지 모른다. 붉은색과 검은색 조명 그리고 몇 십개의 나무의자와 연습복만도 못한 의상으로 구성된 이 작품은 탄생이후 포스트모더니즘을 거치면서 하나의 전형이 되었다. 작품 자체의 위대성보다도 이 작품을 통해 뿌리를 쥐고 있으면서도 근본적으로 새로운 창작의 움직임에 대한 가능성이 제시되었기 때문이다.
공연을 보고 나오면서도 과연 베자르의 안무가 어디가 뛰어난가라는 점은 확실히 알 수 없었다. 다만 명불허전이라고 80줄의 베자르가, 몸이 안 좋아 이번 공연에 직접 오지 못하였다는 알프스 산골의 노인네가 한 때 잘 나갔던 안무가일 뿐이라고 생각했던 나의 오산을 수정할 수밖에 없었으며 비록 전성기의 빛은 바랬어도 17분짜리 발레가 가진 그 문화적 유산에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 가 본 대전문화예술의 전당 아트홀은 훌륭했다. 서울 예술의 전당을 경쟁상대로 삼았다는데 적어도 객석에서의 조망은 훨씬 나았다. 1층 전체가 무대를 내려다 볼 수 있게 된 이 아트홀은 1,500석 규모인데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800석 정도에서 보는 듯 한 안락감을 주고 있었다.(서울의 경우 1층에서는 무용수의 발목이 잘리게 보일 수 있다)
서울로 올라오는 차 안에서 가끔씩 핸들을 잡은 손이 떨렸다. 좋은 작품을 봤다는 감동보다는 한국에서 계속 이래 저래 작업을 하며 살아갈 생각을 하니 밀려오는 까마득함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내차는 차선을 바꾸지 못하고 결국 서울로 올라가고 있었다.

글/이인기 이카루스발레단 예술감독 curias@hanmail.net 사진제공 대전문화예술의전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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