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랑디바”의 즐거움은 어디서 오는가

춤추는거미 | 2004.09.26 01:32 | 조회 5777


"그랑디바”의 즐거움은 어디서 오는가



아주 낯선 공연이 아닌 한 대부분 공연을 볼 때면 이미 어느정도의 기대감을 갖기 마련이다. 얼마만큼의 감동을 받을 것 같다거나 기교가 놀라울 것이라거나, 독특한 이미지를 마주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 그 무엇이 아니어도, 일정 맥락에서 어느 정도쯤의 공연이 되겠거니 은근슬쩍 머릿속에 그려보게된다. 그리고 그 기대와 맥락에 의거하여 가치판단을 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그랑디바”는 어떨까. 스테미너 넘쳐흐르는 근육질의 남자들(아, 다리는 매끈하던데)이 변장 수준의 분장을 하고 터질 것 같은 튀튀를 입고 날아오르는 무대는 상상만 해도 폭소 일반일 것 같다. 절뚝거리는 포인트 워크(발레리나들이 발끝으로 서는 포인트 슈즈를 신고 하는 기교)와 생리학적으로 부족한 균형감과 유연성을 어떻게 풀어낼 것인지도 관건이다. 그래서인지 공연은 시작하기도 전부터 코믹할 것이라도 당연시되었고 관객들은 그저 남성 ‘발레리나’가 등장하는 자체로 웃음보를 터뜨린다.

물론 “그랑디바”는 ‘코믹 남성 발레극’이라고 알려져있고 그 말이 맞다. 그러나 그 웃음이 그저 여장한 남성무용수들의 과장된 제스쳐와 오버 연기에서 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이는 “그랑디바” 공연의 가장 외면적 모습만을 보고 있는 것이다. 그 웃음이 허공에서 돌지 않고 얕지 않은 깊이를 가질 수 있는 이유는 고전 레퍼토리가 패러디되는 방식 때문이다.


<백조의 호수 2막>에서 미묘하게 파르르 떠는 백조의 슬픔과 긴장을 ‘부르르’ 떨어내며 오도방정을 떠는 백조. <로미오와 줄리엣>의 가장 아름다운 장면 발코니 씬에서 철퍼덕 바닥에 엎어져버리는 줄리엣. 게다가 로미오의 뒤로 거꾸로 우아하게 매달려 환희를 전하는 장면에서 줄리엣의 다리는 어정쩡하게 벌어지며 우스꽝스러워진다. 등과 어깨, 팔 관절의 유연함으로 유명한 <빈사의 백조>에서 무용수의 유연함은 과도하여 한쪽팔이 말 그대로 다른쪽 팔 뒤로 돌아가버린다. 팔은 부드럽게 출렁이지 않고 해면체의 다리마냥 그로테스크함을 연출한다. 이 모든 장면들이 원작에 충실한 패러디이며, 그래서 원작을 알지 못하면 ‘유치한’ 웃음밖에 자아내지 못한다. ‘아는만큼 보인다’고, “그랑디바”의 작품들이 딱 그런 셈이다. ‘파르르’와 ‘부르르’의 차이, ‘꼿꼿함’과 ‘느슨함’의 차이, 힙을 약간 비틀어줄 때의 ‘섹시함’과 ‘씰룩씰룩’의 차이에서 웃음은 유발된다.



사실 필자가 “그랑디바”에서 가졌던 기대는 여기까지였으며 실제로 기대한만큼 충분히 웃을 수 있었다. 피상적인 슬랩스틱이나 오버 연기에 마음을 잘 열지 못하는 사람으로서, “그랑디바”가 선사한 패러디는 유쾌했다. 그런데 이 공연은 유쾌함 이상의 즐거움을 전해주어 기대이상이 되었다. 그 즐거움은 성차에서 오는 것이었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남성과 여성의 경계를 오가는 순간들을 마주할 때였다.

그 절정은 <바로크로 가자>를 지나 <해적> 2인무에서 극에 달했다. <바로크로 가자>에서 관객들은 몸의 선과 유연함, 매력적인 미소가 너무나 예쁜 남성 ‘발레리나’에 일차적으로 홀려버렸다. 그리고 등장한 <해적> 2인무의 여자(여기서는 여자라고 ‘자연스럽게’ 나와버린다)는 관객들의 혼을 완전히 빼 놓았다. 상대 남성무용수보다도 큰 몸집에도 불구하고 우아하게 미끄러지는 선과 유연함, 특히 스커트의 물결치는 밑단과 어우러지는 피루엣 등은 일반적 발레리나의 ‘가냘픈 환영’마저 덧씌웠다. 그리고 ‘설마’ 했던 완벽한 테크닉의 구사로 인해 필자는 무아지경에 빠져버렸다.

이런 드문 감정에 빠질 수 있었던 것은 사실 우아함이나 테크닉의 완벽함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는 생리학적으로 ‘남성’인줄 뻔히 알고 있는 인식 구조에 여성적 환영이 자리했을 때, 그리고 그것이 기대 이상의 테크닉으로 재현될 때 느껴지는 극도의 긴장감 같은 것이었다. 남성과 여성의 관습적 모양새를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무용수들과 함께 쉴새 없이 바뀌는 지각의 혼란 속에서 더 자유로운 감상이 가능했던 모양이다. ‘아름답다 저 여자, 아니 남자, 그런데 정말 부드럽고 우아하다 저 남자, 그런데 울퉁불퉁 근육의 저 여자…’와 같은 방식으로. 아니 어쩌면 그 모두가 혼합된 하나의 신비한 이미지를 경험한 것일지도.


그렇지만 “그랑디바”가 여장 남자들의 무대라고 해서 거창한 성 담론에 입각한 심오한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것 같지는 않다. 그보다는 그들의 말마따나, 클래식 발레를 좀 더 재밌게 패러디하여 대중들에게 웃음을 선사하고픈 순수한 바램이다. 혹자의 말대로 그러한 점이 “그랑디바”의 한계로 작용할지언정, 그들은 하루 저녁 무겁지도, 그러나 결코 공허하지도 않은 즐거움을 제공해주었다.



글/ 우유식빵 milkbread@dreamw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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