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의 변신은 무죄(?)

춤추는거미 | 2004.10.31 04:04 | 조회 6918

정재의 변신은 무죄(?)

- <무애무>의 변신을 중심으로

오랜 역사를 지닌 한국춤을 꼽으라면 정재 呈才가 단연 으뜸이다. 한국전통춤의 대표격으로 떠올리는 살풀이춤이나 승무는 기껏해야 백년 안팎의 역사를 갖고 있지만, 정재는 천년 가까운 역사를 지니고 있다. 춤을 중심으로 노래(唱詞)와 반주음악이 곁들여진 종합예술양식의 정재는 주로 궁중과 지방관아에서 행해졌으며, 때로는 임금이 신하에게 내려준 사악 賜樂의 형태로 민간에서 연행되기도 했다.

근대시대에 정재 전통이 단절되었지만 국립국악원에서 정재 재현에 힘쓴 결과, 현재는 50여종에 이르는 대부분의 정재가 재현되었다. 최근 들어 정재의 올바른 전승과 재현에 관심이 많아지고, 국가적인 차원에서 전통문화를 되살리고자 정재가 행해지는 연향자체를 궁궐공간에서 재현하는 움직임도 일어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뒤늦은 감이 있지만 바람직한 방향이다.




정재의 원형은 무엇인가?

‘정재 재현이 잘못되었다’는 비판의 출발점은 재현의 모델이 되는 ‘원형’이 있으며, 그 원형의 모습과 현재의 모습에 거리감이 있다는 문제의식이다. 또한 원형을 최대한 복원해야한다는 판단이 전제되어 있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원형이 어떤 형태인지를 먼저 밝혀야 하는데, 원형을 찾는 일은 그리 쉽지 않다. 통일신라 때부터 내려온 <무애무>의 경우, 원형을 무엇으로 설정할 수 있을까? <무애무>가 최초로 기록된 문헌은 이인로 李仁老(1152-1220)의 <파한집 破閑集>(1260)으로 <삼국유사 三國遺事>(1285)보다 앞선다. <파한집>에 실린 무애무와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옛날 원효대성은 백정, 술장수 등과 어울렸다. 일찍이 목이 굽은 호리병[葫蘆]을 매만지며 저자거리에서 노래하고 춤추었는데, 그것을 <무애>라고 이름하였다. 그 뒤에 어떤 호사가가 호리병 위쪽에 쇠방울을 달고 아래쪽에 채색 비단을 늘어뜨리는 것으로 장식을 삼고는, 가볍게 두드리며 나아갔다 물러섰다 하는데, 모두 음절이 맞았다. 이에 경전의 게송을 따라 <무애가>라 하니 밭가는 늙은이도 이를 모방하여 유희 遊戱로 삼았다.
 

<파한집>의 짧은 내용에서도 <무애무>의 변신이 엿보인다. 원효의 <무애무>를 호사가가 조금 변형시켰고, 이것을 밭가는 늙은이도 유희로 삼았다. <무애무>를 추었던 원효, 호사가, 밭가는 늙은이 등 세 주체(춤꾼)의 모습은 각기 달랐을 것이다. 맨처음 원효가 추었던 <무애무>를 원형이라 치더라도 어떤 노래가락에 맞춰, 어떤 움직임을 갖는지 명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삼국유사>의 내용을 통해 “<화엄경 華嚴經>의 ‘일체에 걸림이 없는 사람은 한 길로 생사를 벗어난다 [一切無?人, 一道出生死]’라는 구절을 따다 ‘무애 無?’라고 이름을 지었다”는 제목의 유래만 분명히 알 수 있을 뿐이다. 원형이라 하더라도 기록의 미비함으로 구체적인 모습을 알 수 없을 때, 재현의 대상이 되는 원형의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정재, 이렇게 변신했다

그렇다면 이참에 정재의 변신과정을 보다 적극적으로 찾아보자.

고려시대에 들어와 <무애무>는 정재의 형태로 궁중에서 연행되었다. 이는 <고려사악지>의 속악조의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통일신라시대 원효가 저자거리에서 포교활동의 하나로 <무애무>를 춤추었다면, 고려시대 <무애무>는 격식을 갖춘 궁중의 연향 자리에서 연행되었다. 춤추는 공간이 저자거리에서 궁중으로 달라졌고, 춤추는 목적도 종교적인 포교활동차원에서 궁중잔치에서 흥을 돋우는 성격으로 달라졌고, 춤추는 주체와 관객구성도 모두 달라졌다. 결국 <무애무>는 고려시대에 궁중에 들어와 저자거리의 마구잡이식 춤에서 정재라는 특정양식으로 변신한 것이다. 이렇게 처음의 모습과 크게 달라진 춤을 동일한 <무애무>의 영역으로 넣을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생길만큼 변신의 폭은 넓다. 그렇다면 정재라는 틀을 갖춘 고려시기의 춤을 <무애무정재>의 원형으로 설정할 수 있을까? 불행히도 <고려사악지>의 기록조차도 재현의 대본으로 삼을 만큼 춤사위가 자세하지 못하다.

 

더구나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불교적인 색채를 강하게 띤 <무애무>는 박해를 받았다. 세종실록 16년 8월 18일 기사를 보면, “<무애정재>가 불가 佛家의 말을 많이 써서 허탄하기 때문에 모든 사악 賜樂에서 <연화대정재>로 교체하라”는 내용이 나온다. 그러나 완전히 폐지시키는 것은 아니어서 세종실록 31년 10월 3일 기사에는 늘 연습해야 할 정재에 <무애>가 들어있다. 세종 이후의 실록기사에서는 <무애무>의 존재가 보이지 않는다.

<무애무>가 다시 궁중에 등장하는 것은 조선후기 순조의 40세 생신잔치 겸 즉위 30년을 기념하는 진찬연에서이다. (이는 <순조기축진찬의궤>(순조 27, 1827)의 부편 附編에 기록되었으며 제시한 정재도를 참고하기 바란다) 순조대의 무애무는 중심배역을 맡은 2명의 무동과 보조적 역할을 하는 10명 무동으로 구성되었으며, 조선시대 마지막 연향의궤인 <고종임인진연의궤>(광무 6, 1902)까지 이러한 형태가 계승되었다. 75년 동안은 큰 변신이 없었던 셈이다. 다행스럽게도 <무애무>의 구체적인 동작진행을 알 수 있는 홀기가 전하는데, 모두 고종 때의 기록이며 이는 현재 정재를 재현할 때 좋은 대본 역할을 한다. 홀기에는 비교적 상세하게 동작절차와 반주악곡명과 창사가사가 기록되어 있다. 고종시기의 <무애무> 창사는 개작된 상태여서 더 이상 허탄한 불가의 말이 전하지 않고, 국왕의 축수를 비는 내용으로 변신하여 채워져 있다.

정재는 오늘도 변신하고 싶다

<무애무>의 변신은 카멜레온과 같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여러 번의 변신을 거듭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고종대의 모습을 재현의 원형으로 상징하여 재현이 제대로 되었느니 못되었느니를 따지는 것은 그리 생산적인 논의가 아니다. 오히려 역사적 맥락에 따라, 시대의 요구에 따라 어떻게 <무애무>가 변신하여 화답하였는지, 당대의 의미가 무엇이었는지를 따져보는 것이 오히려 생산적인 논의가 될 것이다. 긴 역사 속에서 <무애무>는 시대가 요구하는 대로 모습을 변신해 왔다. 이는 원형의 훼손도 변질도 아닌, 춤이 가진 역사성과 춤의 생명력을 반증하는 것이다. 생명이 없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오늘날은 조선말에 비해 모든 것이 엄청나게 변했다. 그러나 오늘날 재현되는 정재는 조선말의 모습에서 크게 변하지 않았다. 정재의 수동적 재현도 필요하지만, 거기에만 머물러 있다면 정재를 죽이는 일일지도 모른다. 오히려 정재는 현대인들과 호흡할 변신을 꿈꾸고 있지 않을까.

글/ 춤바람 조경아 choom71@hanm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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