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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춤추는 거미 | 2013.05.07 17:03 | 조회 7760

    몸의 언어가 작품의 제목을 만들어 낼 때
    - 이영진 씨어터 컴퍼니, <제목 없는 페미니스트 쇼Untitled Feminist Show>,
    장소: 베를린 헤벨 극장 Hebbel am Ufer Berlin -

     



    위태로운 몸들에 대한 위태롭지 않은 형식의 고백

     

    누구나 알다시피, '몸'이 공연계의 주요 담론으로 급부상한 것은 최근의 일이 아니다. 독일의 경우만 하더라도 한스-티스 레만Hans-Thies Lehmann 교수의 기념비적 저서 <포스트드라마적 연극Postdramatisches Theater>이 이미 1999년에 출간되었으며, 바로 그 다음 해인 2000년 초에 독일 현대 무용을 대표하는 안무가 사샤 발츠의 대표작 <몸Körper>이 베를린 샤우뷔네Schaubühne am Lehniner Platz 공연장에서 초연되었다. 물론 춤추는 몸에 대한 관심은 보다 더 거슬러 올라가자면 20세기 초, 세기 전환기의 독일 무용 예술을 대표했던 라반Rudolf von Laban으로까지 소급된다. 라반에게 있어 몸에 대한 관심은 문화화·정치화·규율화 된 근대적 신체에 대한 대립항으로서 새로이 제시된 신체, 즉 자연으로서의 몸에 대한 관심으로 나타난 바 있다. 그렇다면 오늘날 춤의 미디어로서 재발견되고 있는 인간의 몸은 어떻게 무대 위에서 재현되고 있을까.

     

    베를린 무용계를 대표하는 공연장 중 하나인 헤벨 극장에서는 지난 4월 8일부터 14일까지 <위태로운 몸들Precarious Bodies>이라는 제목의 페스티벌이 개최되었다. "백인이 아닌 주체, 남성이 아닌 주체, 서양인이 아닌 주체, 이성애자가 아닌 주체, 그리고 돈을 충분히 벌지 못하는 주체들은 소위 우월한 지위에 속한 사람들에 비해 위반하는 주체이기 쉽다." 페스티벌 프로그램에 명료하게 기입된 주체에 대한 정의는 페스티벌의 제목이 왜 <위태로운 몸들>이 될 수밖에 없는지에 대해 가늠케 한다. 사회적 통념을 위반하는 존재라고 인식되어온 '주체 아닌 주체들', 즉 '주변인으로서의 주체들'에 대한 오마주와도 같은 이번 페스티벌은 1920,30년대 표현주의 무용 시기와는 달리 춤추는 몸을 더 이상 자연적 대상으로 발견하지 않는다. 그 대신, 프로그램에 인쇄된 문구에서도 알 수 있듯이 '~가 아닌'이라는 식의 부정형으로만 자신의 존재가 정의되어온 소외된 주체들의 몸을 페스티벌의 전면에 내세운다. 말하자면 이번 페스티벌은 춤추는 몸을 통해 부정형으로 정의 내려지는 사회적 약자들의 위태로운 존재 방식에 대해 비판적으로 성찰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주는 셈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바로 그 소외된 주체들이 어디까지나 백인, 남성, 서양인, 이성애자, 돈 등의 편견에 근거한 담론 안으로 편입된다는 점에서 무대 위의 몸들은 그리 위태로워 보이지 않는다. 위기에 처한 오늘날의 몸들을 그려내기 위한 기준으로 이처럼 흔하디흔한 이분법적 담론(가령, 주체로서의 백인 대 객체로서의 유색인종)이 호출될 때, 우리는 실제 타자화된 주체가 과연 이 같은 이분법의 안정적 틀 안에서 설명될 수 있기나 한 것인지 의문을 갖게 된다. '유색인종, 여성, 동양인, 동성애자, 가난'이라는 카테고리가 '백인, 남성, 서양인, 이성애자, 자본'의 대척점으로 구성될 때, 그 카테고리는 자주 실제와 동떨어진 모습의 정치화된 객체, 다시 말해 인위적으로 해석된 소외 계층을 만들어내지 않던가. 그런 점에서 이번 페스티벌에 초대된 스웨덴 출신의 연출가 외른Markus Öhrn이 포르노업계에서 널리 통용되는 캐스팅 카우치 상황을 연출함으로써 벌거벗은 여성의 몸을 무대 위에서 도구화할 때, 그리고 모잠비크 출신의 안무가 칸다Panaibra Gabriel Canda가 자신의 솔로 작품에서 문화적 정체성과 탈식민화된 신체에 대해 형상화할 때, 무대 위에 연출된 여성의 몸과 흑인의 몸은 여성과 흑인을 어디까지나 정치적·담론적 소외계층으로 재구성한 시도로밖에는 느껴지지 않는다.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그런 시도 속에서는 정작 오늘날을 살아가는 여성들과 흑인들의 목소리가 울려나오지 않는다.

     

     

    제목 없는 페미니스트 쇼

     

    이번 페스티벌에 초청된 작품들 중 특별히 주목을 끈 작품이 있었으니 현재 미국과 유럽을 중심으로 활동 중인 한국계 미국인 연출가 겸 극작가 이영진의 <제목 없는 페미니스트 쇼>가 바로 그것이었다. 이영진과 여섯 명의 여성 출연자들은 작품이 제기하려는 문제의 성격은 명시하되 (Feminist Show), 그 연출 방향성은 확정짓지 않음으로써 (Untitled) '권력 주체인 남성과 대조되는 객체화된 여성'이라는 성차 간의 이분법적 도식을 뛰어넘는다. 공연 프로그램에 나와 있는 인터뷰에 따르면 이영진은 작품 연습 이전에 미리 대본을 쓰지 않고 오히려 연출 과정 중에 퍼포머와 관객들의 피드백을 받아 대본을 완성시킨다고 한다. 이렇게 완성된 작품은 관객들을 어리둥절하게 하거나 웃김으로써 관객들이 작품에서 제기된 민감한 사회적 테마에 봉착했을 때 열린 마음으로 그 문제와 마주할 수 있도록 한다.

     

    심각한 사회적 이슈를 심각하지 않은 방식으로 경험하게 하는 이 작품의 연출법에서 무엇보다도 인상적인 것은 이 작품이 엄연히 연극을 표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언어를 의도적으로 배제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언어가 제거된 퍼포먼스 형식의 작업이라고 해서 작품의 중심을 이루는 내러티브까지 삭제시키는 것은 아니다. <제목 없는 페미니스트 쇼>라는 제목이 암시하듯이 작품에 구체성을 부여하는 실제 언어는 부재할지라도 작품 전체를 페미니스트 쇼로 연출해내는 몸의 언어는 무대 위에서 살아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이 작품의 시작은 관객석 양편에서 열을 지어 내려오는 여섯 명의 여성 퍼포머들의 등장으로 꾸며지는데, 무대 위에서가 아니라 무대 바깥에서 이루어지는 그녀들의 등장은 그 자체로 메시지가 되어 관객들의 뇌리에 선명하게 각인된다. 고막을 찢을 것처럼 공연장에 날카롭게 울려 퍼지는 일렉트릭 사운드에 맞춰 등장하는 그녀들의 벌거벗은 모습은 혐오스러울 정도로 늘어진 뱃살과 탄력 없이 육중하기만 한 엉덩이 등 시각적으로 불편함을 주는 오브제로 기능한다. 하지만 여성 관객 스스로에게도 생경하게 다가오는 그와 같은 몸의 이미지들은 곧 충격적인 인상으로 전환됨으로써 관객들에게 던져지는 메시지로 화한다. 일반 여성들이 이상적이라 여기는 미의 기준에서 철저히 일탈하는, 지나칠 만큼 비대하거나 또는 지나치게 평범한 정도의 뱃살들. 물컹거리는 살의 이미지가 관객들의 미간을 찌푸리게 하는 바로 그 순간에야말로 관객은 이 작품이 전달하려는 메시지, 그 극도의 내러티브를 직접 체험하게 되는 것 아닐까. 퍼포머들의 희고 검은 피부가, 혹은 다리를 벌려 관객들에게 자신들의 음부를 보여주는 동작이 언어의 자음과 모음의 기능을 대체할 때, 관객들은 실제 언어가 주는 의미 그 이상의 힘을 가진 몸의 메시지와 교감하게 된다. 이영진은 서로 다른 크기와 탄력과 색깔을 가진 몸이 주는 이미지들을 오브제로 활용하는 연출 방식뿐만 아니라 작품에 마임적 요소를 적극적으로 삽입함으로써 퍼포머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퍼포머 개인이 반영된 독립된 이야기들을 부여하기도 했다.
    과감하지만 과하지 않고, 비현실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부단히 현실적인 문제들에 천착하고 있는 쇼. 그리하여 현실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지 않는 방식으로 현실의 민낯을 드러내려하는 쇼. 그것이야말로 <제목 없는 페미니스트 쇼> 속 그녀들이 관객들을 향해 소리치고 싶었던 유일한 '제목'이 아니었을까.

     

     

     

    글 - 손옥주 (독일 베를린 자유대학 연극학, 무용학 박사 과정 재학 중)
    사진 - Blaine Dav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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