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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춤추는 거미 | 2012.11.10 00:52 | 조회 6312

    연극적 패러독스, 그리고 반복
    - 헤르베르트 프리취Herbert Fritsch 연출작,<Murmel Murmel>,
    장소: 베를린 민중극장Volksbühne am Rosa-Luxemburg-Platz, Berlin -

     

     

    헤르베르트 프리취, 연극의 언어를 새로 쓰다.

    우리는 얼마나 오랫동안 같은 단어를 반복해서 내뱉을 수 있을까. 단어가 끊어지지 않게끔 조심스레 호흡을 조절하며 특정한 단어 하나를 속사포처럼 빠르게 내뱉는다고 가정해보자. 스타카토 리듬에 맞춰 단 하나의 단어만을 반복하다보면 반복 시간이 길어질수록 말의 형체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그 말을 내뱉는 우리의 입 언저리에는 서서히 경련이 일어나지 않을까. 더 나아가 심지어 한 편의 연극 작품에 등장하는 단어가 단 하나 뿐이라고 상상해보자. 등장인물간의 대화도, 혼자만의 독백도, 다른 인물들에 둘러싸인 채 내뱉는 방백도 모두 단 하나의 단어로만 구성된다면 가히 연극적 사건이라고까지 칭할 수 있지 않을까. 게다가 여느 연출가들이 쉽게 시도하지 못할 이 무대를 보기 위해 매회 공연에 관객들이 밀물처럼 가득가득 밀려들기까지 한다면. 현재 독일 연극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연출가로 손꼽히는 헤르베르트 프리취의 2012년 신작 <무어멜 무어멜Murmel Murmel>은 11명의 배우들이 약 90분간 'Murmel'이라는 단어 하나만을 내뱉는 작품이라는 점에서, 게다가 그 한 단어로 관객들이 전혀 지루해하지 않을 정도의 다양한 내러티브를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초연 때부터 독일 공연계에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1951년생인 프리취는 90년대 초반부터 불과 얼마 전인 2007년까지 베를린 민중극장에 배우로 소속되어 민중극장의 역사를 대표하는 연출가 프랑크 카스토프Frank Castorf의 작품 주연으로 왕성히 활동한 바 있다. 이후 뒤늦은 나이에 본격적으로 연출가의 길로 들어선 그는 민중극장과 같은 세계적인 극장에서 뿐만 아니라 지방에 있는 작은 규모의 극장에서도 자신의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했는데, 움직임과 소리와 조명과 무대미술이 어우러진 한 편의 쇼를 연상시키는 독특한 연출법을 바탕으로 한 그의 작업은 얼마 지나지 않아 관객들의 큰 호응을 얻게 된다. (실제 그의 연출작 중 총 세 편의 작품이 매해 독일어권 최고의 작품들이 초청되는 베를린 테아터트레펜Berliner Theatertreffen에 작년과 올해에 연속해서 진출한 바 있다.) 특정 희곡에 기본하는 언어극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을 넘어 언어극이라는 형식 자체에 대해 회의하는 연출가 프리취는 그에 대한 대안으로 시시껄렁한 농담을 작품에 삽입하거나 언어의 역할을 대체할 방법적 수단으로 과장된 동작과 표정을 제시하기도 한다. 그 때문에 연극과 무용과 비주얼 아트가 종합된 방식으로 연출되는 그의 작품은 마치 20세기 초의 러시아 아방가르드 정신이 부활한 듯한 인상을 준다. 특히 <무어멜 무어멜>의 경우, 특정한 의미가 담기지 않은 단어 하나를 (독일어 동사 murmeln은 우리말로 '웅얼거리다'라고 번역되지만 한 인터뷰에서 프리취는 이 단어에 담긴 뜻을 연출가인 자신도 여전히 알 수 없다고 고백한 바 있다.) 배우들마다 전혀 다른 발성과 화법으로 표현해냄으로써 배우의 발음이 발화로 전환되는 과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말하자면 배우들이 내뱉는 단어의 길이나 음성의 고저 등에 따라 동일한 단어가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는 점에서 매우 독특하고도 특별한 연출 시도라 할 수 있다.

     

     

     



     

    Murmel Murmel Murmel Murmel Murmel Murmel Murmel ……

    그러나 순전히 연출자의 아이디어로 구성되었을 것 같은 <무어멜 무어멜>에도 엄연히 오리지널 희곡이 존재한다. 프리취가 스위스 출신의 다다이스트 디터 로트Dieter Roth의 1974년작 <Murmel>을 처음 접한 건 80년대 초반이었다고 한다. 플럭서스 운동에도 참여했던 로트가 무대 상연을 위해 쓴 이 작품에서는 Murmel이라는 동일한 이름을 가진 11명의 출연자가 장장 176쪽에 걸쳐 오로지 Murmel이라는 단어 하나만 계속해서 내뱉는다. 그러나 그 실험적인 희곡작품에서 매혹적인 리듬을 찾아낸 프리취는 반드시 이 작품을 무대화하리라 결심했고 마침내 올해 그 결심을 베를린 무대에서 실현시키게 된 것이다. 이번 작품을 위해 민중극장의 오랜 동료들과 함께 작업한 그는 연출뿐만 아니라 무대미술까지도 직접 담당해 배우들의 신체 움직임과 무대라는 공간적 움직임 사이의 조화를 효과적으로 만들어내기도 했다.
    <무어멜 무어멜>에는 두 명의 여배우들과 여덟 명의 남자배우들, 그리고 여배우로 분한 한 명의 남자배우가 등장한다. 작품이 시작되면 정장 차림을 한 배우들이 한 명씩 나와 자기만의 방식으로 '무어멜'을 읊기 시작한다. 누군가는 마치 지휘자처럼 박자를 타며, 누군가는 격한 아크로바틱 동작을 해가며, 누군가는 화려한 조명 아래 마치 모델처럼 걸어 나오며, 누군가는 가만히 한 자리에 선 채로, 스타카토 형식으로 매우 빠르게, 또는 매우 느리게, 또는 한 글자씩 또박또박, 또는 찢어질 듯한 고음으로, 또는 뭔가를 그리워하는 것 같은 아련한 목소리로 단 하나의 단어만을 읊는다. '무어멜 무어멜'로 시작된 말은 1분이 지나고 2분이 지나고 심지어 5분, 10분 가까이 지날수록 본래 지니고 있던 형태 너머로 아득하게 퍼져나가 '무르멜 무르멜', '무멜 무멜', '뭐멜 뭐멜', '부베 부베', '뭐 뭐' 등의 다른 형식 속에서 빛을 발하게 된다. 시간의 연속 속에서 시시각각 변하는 배우들의 언어는 극장이라는 공간 안에서 그 시간을 온전히 함께 체험하는 관객들에게까지 고스란히 전해져 심지어 관객이라면 누구나가 공연이 끝나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자기도 모르게 한참동안이나 '무어멜 무어멜'하고 웅얼거릴지도 모른다.
    이 작품에서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바로 슬랩스틱 코미디를 연상시키는 배우들의 동작과 강렬한 형광색의 무대세트였다. 무대에는 각각 상하와 좌우로 이동하는 벽 형식의 세트 외에는 별다른 세트나 소품이 등장하지를 않는데, 세트가 한 순간에 상하 또는 좌우로 움직이며 만들어내는 역동성은 그야말로 같은 공간에 대한 관객의 감각을 순식간에 뒤바꿔버릴 정도로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게다가 마치 카메라의 줌인-줌아웃의 역학과도 유사하게 세트가 위에서 내려오는 동시에 양 옆에서도 무대 중앙을 향해 이동하기도 하는데, 그 경우에 마치 카메라가 특정 지점에만 포커스를 맞추듯이 지극히 좁은 무대의 한 지점만을 남기고 다른 부분은 모두 세트로 가려버림으로써 공간에 대한 관객의 지각을 극단적으로 변형시키기도 한다. 상업적 쇼나 인형극을 연상시킬 정도로 매우 양식화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속에 각자의 개성을 담아내는 배우들의 움직임은 이 같은 공간적 미디어와 호응하며 끊임없이 관객들의 감각을 건드린다.
    프리취는 한 인터뷰에서 자신의 작품 컨셉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힌 바 있다.
    "우리는 색채, 소리, 완전한 형식, 추상적인 구조 등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잖아요. 우리에게 있는 것이라고는 무대에 등장하는 사람들뿐이거든요. 우리가 시도하려는 건 패러독스나 마찬가지죠. 피와 살로 이루어진 사람을 가지고 사물 없는 극을 만들려는 건데, 이건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니까요. 그러니까 당연히 계속해서 실패하게 되는 거예요. 우리가 만들어내려는 추상적인 구조는 미학적인 것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병리학적인 것에 대해서까지 작용한답니다."
    거듭되는 실패를 여전히 두려워하지 않는 이 노장 연극인의 꿈. 사람이 등장하되 사람을 넘어서는 감각적 공간을 실제 무대 위에 구현하길 원하는 이 나이든 신인 연출가의 소망. 환갑의 나이를 넘긴 프리취의 연극 인생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글 - 손옥주 (독일 베를린 자유대학 연극학, 무용학 박사 과정 재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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