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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춤추는 거미 | 2012.07.05 16:40 | 조회 6589
    재현의 포기 = 소통의 단절?

    긴터스도르퍼/클라쎈Gintersdorfer/Klaßen,<데지스티렌Desistieren>

    독일 공연계의 신선한 돌풍, 긴터스도르퍼/클라쎈

    2010년 늦은 봄쯤으로 기억한다. 우연한 기회에 연극 연출가 모니카 긴터스도르퍼Monika Gintersdorfer와 미술작가 크누트 클라쎈Knut Klaßen이 함께 만든 컬렉티브 '긴터스도르퍼/클라쎈'의 작품 <오셀로, 그것은 누구인가? Othello, c'est qui?>를 처음 접하게 되었다. 그 즈음 탈식민주의 퍼포먼스에 대해 연구하는 한 지인으로부터 이 작품이 독일 서부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에서 격년으로 개최되는 독립연극인들의 축제 '페스티벌 임펄스Festival Impulse' 2009년 수상작이라는 이야기를 전해들은 바 있었다. 그런데 마침 그 다음 해에 같은 작품이 독일어권 최대의 연극 축제인 테아터트레펜TheaterTreffen에 전년도 '페스티벌 임펄스'의 수상작 자격으로 특별 초청되어 베를린에서도 이들의 작품을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공연은 독립 퍼포먼스 프로젝트를 위한 공연장 소피엔젤레Sopiensaele에서 진행되었는데, 이곳을 꽉 메운 관객들은 한 시간 남짓 흘러가는 공연 시간 내내 쉴 새 없이 웃기도 하고 문득 문득 자신들을 향해 던져지는 생각의 지점들에 대해 숙고하기도 했다. '그'가 아닌 '그것'으로서의 오셀로에 대해, 오셀로로 분한 서부 아프리카 코트디부아르 출신의 퍼포머 프랑크 에드먼드 야오Franck Edmond Yao와 그의 프랑스어를 독일어로 번역하는 동시에 그의 '관능적인' 동작을 관능적이지 않게 따라하는 독일인 여배우 코르넬리아 되르Cornelia Dörr 사이의 긴장에 대해, 셰익스피어 시대 이래로 몇 백 년 동안이나 오셀로라는 이름 아래 재현되었지만 정작 오셀로라는 작품에 대해 아는 바가 별로 없다는 익명의 아프리카인들에 대해.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깊이 깊이 연결되는 그 생각들이 최종적으로 이르는 지점에 우리 일상에 대한 어떤 상반된 반영이 놓여있다는 사실이다. 현실에 대한 자기반성, 허나 자기 스스로를 반성하게 하는 우리의 현실 자체는 사실 유쾌하고 재미있게 전유될 수 있다는 식의 이중성. <오셀로, 그것은 누구인가?>에서 이 같은 이중성은 인종 담론, 젠더 담론, 탈식민주의 담론 등으로 재번역되며 관객의 감정을 파고든다. 가령 이런 식으로 말이다: 공연 내내 흑인에 대한 클리셰로 가득한 움직임의 내러티브를 따라 나도 웃고 내 옆의 당신도 웃고 내 앞 무대의 퍼포머들도 웃고, 이렇게 다 같이 떠들썩하게 웃어댄다. 이처럼 모두가 왁자지껄하게 웃을 수 있는 이유는 간단하다. 정말로 웃기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느 누구도 내가 지금 보고 있는 동작이 내 의식 속에 새겨진 문화적 클리셰와 연결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퍼포머가 공연 말미에 문득 웃음을 멈춘 채 관객들을 향해 '지금까지 당신이 웃고 있었다는 걸 아는가. 당신이 무엇에 대해, 무엇을 보며 웃고 있었다는 걸 아는가.'라는 식의 질문을 던지면 관객들은 순간적으로 매우 당황하게 된다. 질문을 받고서야 내 웃음이 단순히 중립적인neutral 감정 표현이 아닌, 일상에 깃든 정치적 무의식의 반영일 수 있다는 생각에 이르기 때문이다. 이것은 매우 유쾌한 쇼다. 하지만 동시에 이것은 새로운 형식의 교훈극Lehrtheater이다. 


    Desistieren, 무엇에 대한 포기인가?

    오셀로 재해석에 이어 아프리카 출신 무용수들과의 협업을 통해 탄생한 <로고비Logobi> 시리즈로 국제적 명성을 얻게 된 긴터스도르퍼/클라쎈의 새로운 프로젝트는 현재 <데지스티렌>이라는 제목으로 꾸준히 발표되고 있다. 올 3월 중순에 1편부터 3편까지, 그리고 얼마 전인 6월 중순에 최신작인 4편이 소피엔젤레에서 관객들에게 처음으로 선보여졌다. 2005년 창단 이후부터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이번 작품들 역시 대부분 이 두 예술가의 트레이드 마크와도 같은 일정한 형식(특별한 무대 장치가 없는 무대 위에 서로 다른 문화나 성별, 활동 장르 등을 대표하는 두 명의 퍼포머가 나와 관객들에게 자신들이 살아온 이야기를 덤덤히 들려주거나 한 사람의 동작을 다른 한 사람이 따라하는 등의)에 근거한다. 예를 들어, 이번 새 프로젝트 1편에는 <오셀로, 그것은 누구인가?>에도 출연한 바 있는 프랑크 에드먼드 야오와 독일인 미술작가 마르크 아쉔브렌너Marc Aschenbrenner가, 그리고 2편에는 코트디부아르 출신의 DJ 메코Meko와 미국에서 온 퍼포머 멜리사 로건Melissa Logan이 출연한다. 최근 초연된 4편에서는 이례적으로 아프리카 출신 퍼포머 대신에 독일인 안무가 요헨 롤러Jochen Roller와 미국인 안무가 리처드 시갈Richard Siegal이 출연해 쇼적인 요소가 많이 가미되었던 이전 작품들과는 상당히 다른, 현대 무용의 즉흥성이 크게 가미된 듀엣을 선보인 바 있다.

    그러나 평론가 엘리자베스 네링 박사도 지적하듯이, 관객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던 기존의 작품 형식에 새로운 실험성을 덧붙이고자 했던 이번 <데지스티렌> 시리즈에서 "신선하고, 아이러니컬하고, 재미있고, 동시에 똑똑했던" 이전 작품의 컨셉들은 어느새 낡아버린 듯한 인상을 준다. 그리하여 퍼포머들이 자신의 경험을 즉흥적 동작에 담아 펼쳐 보임에도 불구하고 "점차 연출에 따라 기능하는" 상황이 발생하곤 한다. 독일어 Desistieren은 말 그대로 무엇인가를 단념하거나 포기한다는 뜻이다. 4편에 출연한 요헨 롤러는 라스코 동굴 벽화를 11년에 걸쳐 가장 근접하게 재현해낸 또 하나의 라스코 벽화와 자신의 퍼포먼스를 비교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라스코의 고고학자들과 반대로 우리는 특정한 형상을 따라 그리기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표면적인 재구성은 제거한 채로 따라한다." 다시 말해, 이번 시리즈에서 강조되는 단념과 포기의 대상은 무엇인가를 그대로 복사해내듯이 따라하는 것, 즉 리얼리즘적 재구성, 그 자체인 셈이다.  하지만 바로 그러한 단념이 작품 전체의 근간을 이루는 주제로서 창작 전면에 등장할 때, '상대를 따라하기는 하지만 따라하지 않는 방식으로 따라하는 것'이라는 주제 상의 모순이 어떻게 무대 위에 실현될 수 있는가의 문제가 늘 뒤따르게 마련이다. 게다가 이것은 자기 독백이 아닌 관객과의 대화로서의 공연 형식에 부합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 같은 모순적 형식의 모방을 작품 속에서 그리고자 한다면, 그것은 관객들에게 감각적으로 전해져야 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번 <데지스티렌> 시리즈에 나타난 두 퍼포머 사이의 소통은 오히려 단념과 포기로 인해 언어, 동작, 관객과의 교감, 이 모든 게 오로지 퍼포머 개인 안에 갇혀 각자의 내부만 빙글빙글 돌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쇼도 아니고 교훈극도 아니고 추상적 움직임도 아니고 (추상적인 움직임은 대개 매우 구상적이다) 그렇다고 따라하기라고도 하기 어려운 움직임의 종착역은 단 하나, 지루함이 아닐까. 오셀로를 유쾌하게 전복했던 것과 같은 발칙한 신선함을 두 예술가 컬렉티브에 다시 한 번 기대하고 싶은 건 그들의 작품을 관심 있게 지켜보는 모든 관객의 바람일 것이다.


    글 - 손옥주 (독일 베를린 자유대학 연극학, 무용학 박사 과정 재학 중)
    사진 - 1,2,3: Knut Klaßen 4: Gintersdorfer, Klaß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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