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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춤추는거미 | 2012.01.14 18:25 | 조회 5974

    힙합, 관계에 대해 이야기하다



    현재 전 세계 현대 무용의 메카로 손꼽히는 이곳 베를린에는 무용 및 퍼포먼스 공연을 관람할 수 있는 크고 작은 공연장 수만 헤아려도 족히 서른 군데쯤 된다. 이들 공연장에서 여름 휴가철이나 크리스마스 휴가철을 제외하고 거의 연중 내내 다양한 프로그램이 진행되다보니 심지어는 하룻저녁에 열편 이상의 무용 공연이 베를린 시내 여기저기서 동시에 펼쳐지기도 한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정기적으로 발간되는 무용 공연 캘린더를 살펴보노라면 기성 안무가들과 신예 안무가들의 작품으로 빽빽하게 채워진 공연정보들 속에서 종종 길을 잃고 뭘 봐야할지 몰라 고개를 두리번거리게 된다. 볼 게 많아도 고민인 셈이다.


    하이브리드 세상 속 정체성 찾기

    필자 개인적으로 해외 유명 무용단의 베를린 투어에도 관심이 가지만 요즘 들어 그보다 더욱 주목하게 되는 것이 있으니 바로 베를린을 거점으로 활동하고 있는 신예 안무가들의 작품이다. 타 유럽 도시들에 비해 저렴한 물가, 그리고 프리랜서로 활동하며 작품을 발표할 수 있는 공간이 비교적 많이 확보되어있다는 등의 이점 때문에 매해 베를린으로 모여드는 전 세계 예술가들의 수는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이들 중 다수가 독일어권 바깥에서 모여든 외국인들이기 때문에 각자 독일이라는 생소한 공간에서 지내면서 직접 경험한 문화적 차이를 작품화시킨다는 사실이다. 이때의 문화적 차이란 외모가 될 수도 있고 사고방식이 될 수도 있고 언어가 될 수도 있다.

    실제 요즘 공연되는 몇몇 작품에서는 서로 다른 국적을 가진 무용수들이 출연할 뿐만 아니라 (물론 다국적 무용 그룹은 이미 피나 바우쉬 무용단에서 뿐만 아니라 심지어 미국의 데니숀 컴퍼니와 같은 20세기 초반의 근대 무용단들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들이 자신의 모국어로 대화를 주고받는 장면에서 번역 자막을 제공하지 않는 식의, 관객들을 향한 '의도된 불친절'을 작품의 큰 특징으로 삼곤 한다. 이처럼 현재 베를린에서 활동 중인 외국계 안무가들의 경우에 대부분 베를린 무용계의 배타적이지 않은 분위기에 동화되는 한편 자기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문화적 배경을 작품 속에 적절히 녹여내려는 '동화적 타자성'을 실천하고자 노력한다. 말하자면 타자라는 분명한 의식을 가지고 자신의 타자성을 작품화시킴으로써 오히려 거대한 문화적 패치워크와도 같은 베를린 무용계에 동화되어가는 것이다.




    세바스띠앙 라미레즈&왕현정, <몬치치Monchichi>
    (2011년 11월 23일-25일, 장소: 베를린 헵벨 테아터Hebbel am Ufer)


    지난 11월에 헵벨 테아터에서 공연되었던 세바스띠앙 라미레즈Sébastien Ramirez와 왕현정의 듀엣 <몬치치> 역시 '세계화', '2,3세대 이민자', '간 문화성' 등등 어느덧 거대한 시류를 형성하며 우리 시대의 보편적 담론으로 안착해버린 주제들에 대한 오마주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스페인계 부모를 두었지만 프랑스 남부에서 자란 라미레즈와 한국인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자란 왕현정의 자기 정체성에 대한 자각적 질문은 방글라데시 출신의 부모를 둔 영국 안무가 아크람 칸과 모로코계 벨기에 안무가 시디 라르비 셰르카위가 자신들의 작품 <제로 디그리즈 zero degrees>를 통해 고민해보고자 했던 정체성에 관한 질문들을 상기시키며 이 작품의 시작과 끝을 이룬다. 태어나고 자란 공간에서조차 인종적, 문화적, 역사적으로 이방인일 수밖에 없었던, 그리고 그 다름을 체현하는 것이 곧 삶이었던 두 안무가에게 있어 하이브리드 세상 속에서 스스로에게 던지는 정체성에 관한 질문은 시대적 담론이라기보다는 어쩌면 개인적 필연일 것이다.


    웨이브, 관계의 미학

    <몬치치>를 관람하고 난 후 지금까지도 머릿속을 쉬지 않고 맴도는 장면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조심스레 맞닿은 두 무용수들의 손가락을 타고 흐르던 웨이브다. 조명에 따라 붉게 푸르게 시시각각 변하는 배경 막 앞에 선 두 무용수는 무대 정면만 타오르듯 비추는 조명 속에서 순식간에 검은 형체가 된다. 그리고 이들의 맞닿은 손끝에서부터 시작된 웨이브는 마치 상대의 에너지와 감성과 시간이 서서히 상대에게 전이되듯이 서로의 몸 전체로 퍼져나가기 시작한다. 손에서부터 몸으로, 그리고 팔로 다리로 뻗어나가는 부드럽고 둥근 이미지들은 어느새 작품을 마주하고 있는 관객들의 마음속에서도 출렁인다. 사각의 공연장 또한 오랫동안 이어지는 두 무용수들의 웨이브를 타고 비현실적 꿈의 공간으로 서서히 변해간다.  

    두 무용수 모두 현재 유명 스트릿 댄서로 활동 중인 만큼 <몬치치>의 핵심동작은 힙합 댄스, 그 중에서도 특히 웨이브가 강조된 동작들로 구성된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유명 힙합댄서들이 힙합을 현대 무용과 접목시켜 자신만의 동작문법을 창작해내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들 역시 이번 작품에서 힙합에 현대 무용과 탱고뿐만 아니라 연극적 요소까지도 삽입시킴으로써 일종의 '하이브리드 탄츠테아터'를 실험해보고자 한다.


    라미레즈와 왕현정의 '하이브리드 탄츠테아터'에는 여성과 남성, 탱고용 하이힐과 힙합용 운동화, 금발 가발과 검은 색의 머리, 솔로 댄스와 듀엣, 한국어 독일어 영어 스페인어 프랑스어 등의 상반된 기호들이 씨줄과 날줄이 되어 한 작품 안에서 서로가 서로를 엮는다. 이처럼 다양한 공연 요소들을 어떻게 성공적으로 엮어낼 수 있는지에 대한 이들의 고민이야말로 바로 패치워크로서의 문화 공존을 지향하는 베를린 무용계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끊어지지 않고 한 곳에서 다른 곳을 향해, 혹은 나에게서 타자를 향해 흐르는 웨이브는 그 자체로 퍼포먼스가 그려내는 관계의 미학을 대변한다. 이 같은 관계의 미학은 비단 움직임에서 뿐만 아니라 무대 미술이나 소품을 통해서도 살펴볼 수 있다. 무대 구조는 마치 크리스마스트리 장식과도 같은 작은 전등들이 드리워진 커다란 나무 한 그루만이 무대 왼편에 세워져있는 매우 단출한 구조다.

    공연 중간, 마치 어린 시절 종종 보곤 했던 서커스 광대들처럼 두 무용수가 나무 곁으로 가 반딧불이처럼 반짝이는 작고 빨간 불빛을 손가락으로 집었다가 어디론가 감추는 장면이 등장한다. 어느새 눈앞에 나타나는가 하면 금세 또 다시 어디론가 사라져버리는 불빛을 관객들의 눈이 정신없이 좇고 있을 때, 무용수의 손을 떠난 불빛이 한 순간에 무대를 떠나 관객석을 한 바퀴 돌고 다시 무대로 회귀한다. 그리고 관객들을 향한 여정을 마친 불빛이 다시 무대로 돌아온 그 순간에 조명 전체가 무대를 붉게 비춘다. 그 붉게 물든 무대가 주는 인상은 마치 두 무용수와 관객 모두가 한 공간 안에서 더불어 체험한 관계의 잔영과도 같아서 쉽게 지워지지 않는 한 줌의 감동을 남긴다.

    베를린이라는 멀티문화적 도시 공간에서 '하이브리드 탄츠테아터'로서의 힙합이 앞으로 어떻게 감동적인 장르로 진화해나갈지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글 - 손옥주 독일 베를린 자유대학 연극학, 무용학 박사 과정 재학 중
    사진 - Hebbel am Ufer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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